▶책 소개
반세기가 지나도록 시집 낸 ‘시대의 서정시인’
22번째 시집 출간
‘시작 노트’로 독자에게 '말을 거는' 새로운 형태의 시집
지난 70년대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꾸준히 시를 쓴 ‘시대의 서정시인’ 이기철의 22번째 시집이다. 이기철 시인은 평균 2~3년 간격으로 시집을 낸 셈이다.
《오늘 햇살은 순금》은 여든을 넘어서도 새로운 생각들을 찾아 안착시키는 시인의 단련된 언어 근육을 보여준다.
초기엔 자연을 노래했고 중기 이후엔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에 주목했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두 개의 큰 기둥으로 삼았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읽으면 다음 시가 궁금해 책을 놓을 수 없게 되는 시집을 꿈꾼다"면서
"먹어 보면 자꾸 먹고 싶은 젤리 같은 시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에는 시인이 자신의 작품과 관련한 생각들을 적은 ‘시작 노트’가 시집의 이곳 저곳에 편집해놓았다. 또한 시의 일정 부분을 따로 떼어내서 다른 페이지에서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시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을 마치 잔상효과처럼 다시 체험하도록 유도했다.
서울셀렉션은 시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시집을 출간했다면서, 이번 시집을 '시가 말을 걸다' 시리즈 1호로 이름 붙였다.
시집에 시와 평론 이외의 다른 것을 넣지 않는 국내 시집 출판의 오랜 관행을 버린 데 대한 독자들의 평가가 주목된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 이번 시집의 큰 기둥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향한다’는 묵시록 같은 울림
이기철의 시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작은 들꽃과 같다. 하지만 그 익명의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주의 완결로 꽉 차 있다. 여물디여문 그만의 정체성이 아름답다.
70년대 이후 쉬임 없이 한국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는 유려한 작품들을 쏟아낸 시인의 명성이 오히려 무색할 만큼 그의 시편들은 아직은 이 생에서 꼭 만나야 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처럼 수줍고 애잔하고 간절하다.
시인의 22번째 시집인 《오늘 햇살은 순금》은 그러나 반세기가 넘는 그의 시력과는 무관하게도 여전히 톡톡 튀는 감각과 신선함을 매력 포인트로 앞세우고 있다. 시인이 시작 활동 초기엔 자연을 노래했고 중기 이후엔 아픔과 관조를 노래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다 말하지 못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로 표현하면 “지금은 끝내 놓아 버릴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고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다. 초기와 중기를 자연에서 사람의 세계로 돌아온 뒤 생채기를 감내해야 했다면, 이제 다시 새롭게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람의 세상을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
서정이 고갈되어 가는 이 시대에 서정이란 결국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시인. “얼마나 기다렸느냐, 아프진 않았느냐 자근자근 물으며/이마를 짚어 주는 너의 손같이/섬돌에 내리는 빗방울”(<섬돌에 빗방울>
부분).
사랑이 사람으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결국 만천하에 밝혀지고야 마는 묵시록처럼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리움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고 온다/나는 이 말을 하기까지 예순 해가 걸렸다”(<기다림이 있을 때가 살아 있는 것이다> 부분) “오실 땐 풀밭을 지나오세요/입술연지 얼굴화장은 안 해도 됩니다”(<기다림은 초록> 부분)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도 결국 사람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아직 아무도 쓴 적 없는 깨끗한 말을 골라/병을 이기고 일어선 사람의 단추 끝에/달아 주기 위함이다”(<시를 쓰는 이유>
부분)
시인은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시(<가슴이 백짓장 같은 사람>)에 달려 있는 시작노트에서 “그래서 나는 사람을 향해 시를 씁니다.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시작 배경을 담은 ‘시작노트’로 독자와의 거리 좁혀
시의 일부를 별도 페이지에 재편집, 잔상효과 통한 시적 이미지 강화
시 제목에 해시태그 표시, 스레드 등
SNS 활용 유도
‘시가 말을 걸다’ 시리즈로 출간
《오늘 햇살은 순금》에는 시인이 시와 관련된 생각들을 직접 작성한 ‘시작노트’가 들어 있다. 독자들이 시인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어의 내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게 그 의도다.
서울셀렉션 지태진 편집팀장은 “시작노트가 시인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는 한편, 다층적이고 풍성한 시 읽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시집의 형태적인 변화를 통해 시와 독자와의 공감과 소통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집에는 또한 시의 일부분(이하 '부분 시')을 다른 페이지에 반복함으로써 일종의 잔상효과를 통한 메시지의 확실한 전달도 꾀했다.
시작노트와 부분 시에는 모두 해시태그(#) 표시를 해서 SNS 사용자들이 시의 제목들을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시작노트에는 '#이기철노트(시제목)'이, '부분 시'에는 '#이기철(시제목)'이 해당 글 밑부분에 주소처럼 적혀 있다.
아울러 시의 제목으로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목차 외에도 ‘가나다순 시 찾아보기’도 수록했다.
서울셀렉션은 앞으로 시인과 독자의 소통 통로를 확대하는 시집을 ‘시가 말을 걸다’라는 시리즈명으로 계속 출간할 계획이다.
▶책 속으로
그리로 그리로 가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로 그리로
가도 없어서 아린 마음이 그리움이다
돌아설까 돌아설까 발을 꾸짖으면서도 돌아설까
돌아설까 못 돌아서는 마음이 그리움이다
왼쪽으로 가려다 멎고 오른쪽으로 가려다 발을 돌리는,
가도 가도 제자리인 마음이 그리움이다
그 사이 보리가 패고 물 흘러가고 죽은 새의 깃털이
바람에 날리고 복사꽃 지고 단풍도 지고
그래도 한 발짝만 더 영원으로 서서 하루를 찬 돌 위에
세워 두는 마음이 그리움이다
단 한 번의 만남과 이별 그것으로 일생을 견디는 힘이
그리움이다
_「그리움의 색동옷」 전문
그대 한복판에 닿고 싶어서 내 발은 오늘도 그대 그늘
백 리 밖을 혼자 서성이네
내 몸 어딘가에 숨겨 둔 마음은 저 혼자 두근거려
제 무게를 간신히 견디네
우리가 풀밭이라고 말하는 초록나라의 자디잔
이야기는 사람의 귀로는 듣지 못하네
햇살 아래 햇살 아래 흐르는 냇물, 오라는 당부
없어도 내일이 온다고
혼자 나선 십 리 펄, 내게 온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걸어가는 등 뒤엔 한때 그리움이라고 말했던 사람의
이름이 쌓이네
흔들려 땅의 중심인 풀밭나라에 오늘도 햇볕은 단품
식탁을 차리네
반짝임이 언어인 초록 위에 혼자 노는 햇볕을
잡으려다 두 손만 데네
_「풀밭 나라에서 안부를」 전문
강가 모래밭에 점점이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 가끔 모래톱을
씻고 가는 찰싹이는 은빛 물살, 강 저쪽에서 들리는 어린 물새의
울음, 바람에 파란 손을 흔드는 포플러 잎사귀, 떨어지는 햇빛은
순금. 가난해서 깨끗했던 한 사람의 생애, 그가 남긴 몇 줄의 시,
마음에 묻어 오는 옛날의 그림자.
#이기철노트풀밭나라에서안부를
쑥과 냉이와 민들레와 두릅잎과 씀바귀와 우산풀과
미나리싹과 단추꽃과 집게벌레와 개똥벌레와
무당벌레와 장수풍뎅이와 건초더미와 마른 짚동과
삭은 이엉과 깨진 기왓장 위를
얼마나 기다렸느냐, 아프진 않았느냐 자근자근 물으며
이마를 짚어 주는 너의 손같이
섬돌에 내리는 빗방울
_「섬돌에 빗방울」 전문
이마를 짚어 주는 너의 손같이
섬돌에 내리는 빗방울
#이기철섬돌에빗방울
오실 땐 풀밭을 지나오세요
입술연지 얼굴화장은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올 때는 조심하세요
절대로 푸른 보리밭을 밟아선 안 됩니다
초록이 아파하면 내가 슬퍼지고
구름이 울며 떠나는 걸 보면 눈시울이 젖습니다
종조리가 날아가며 슬픈 노랠 부른다면
내가 먼저 아픕니다
밀밭에 초록들이 운동회의 아이들처럼
손 겯고 달려가는 게 보이나요
오실 땐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걷듯 오세요
소다수 한 잔 마시고 현관을 나설 때
파아란 물감이 당신의 신발을 물들일 수 있다면
하얀 맨발인들 어떻습니까
그때 나는 풀밭에 앉아
지난가을에 당신이 보낸 편지를
세 번째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_「기다림은 초록」 전문
사과꽃을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 쓰고 싶다. 사과꽃은
살구꽃이나 벚꽃처럼 화사하지 않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대 집 담장 위로 사과꽃
돋거든 다섯 자 사연 적은 엽서 한 장 보내주오, 그러면 나는
긴긴 편지 다섯 장을 그대에게 보내리니.
#이기철노트기다림은초록
▶저자 소개
이기철
시인 이기철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대학에서 정년 퇴임한 뒤 지금은 경북 청도의 산골에 서재를 마련하여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시를 쓰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다.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영원 아래서 잠시》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했고 김수영문학상, 박목월문학상, 아림예술상, 후광문학상 외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이 시집은 시인의 22번째 시집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관심은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번 시집에도 ‘사람’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늘 이름 없는 것에 대한 애정을 시에 담으며 미려한 언어로 사물을 독자의 곁에 옮겨 놓는다. 시를 통해 모든 낯섦을 낯익음으로 바꾸어 놓는 일, 그것이 시인이 선물하는 시의 힘이다.
처음 온 오늘에겐 새 이름을 불러 주자 | 그리움의 색동옷 | 근심을 지펴 밥을 짓는다 | 저녁에게 지붕을 맡겼다 | 풀밭나라에서 안부를 |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너의 삶을 칭찬해 주어라 | 아침나라 일기 | 등불 같은 이름 | 어제오늘내일 | 가을 부탁 | 섬돌에 빗방울 | 첫 햇살 | 유혹하고 싶은 날씨 | 고요에게 말 걸다 | 겨울 각북리 | 부엌에 시를 걸어 둔 사람 | 오월이 온다는 것 | 시를 쓰는 이유 | 기다림은 초록 | 참 좋은 사람 하나 | 기다림이 있을 때가 살아 있는 것이다 | 가슴이 백짓장 같은 사람 | 봄날은 백 겹 | 기쁨 | 행복 | 맑은 날
참깨꽃 핀 마을을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 꽃 | 라일락이 피면 오세요 | 국화를 보며 | 가을에는 새 옷을 입고 싶다 | 단추꽃 | 여름 한낮 | 개나리꽃 | 앵두꽃 | 시가 아장아장 걸어올 때 | 풀들은 속옷이 아름답다 | 장미는 내가 피우지 않았다 | 벼룩풀 곁에서 | 목련 질 때 | 채송화에게 주는 헌사 | 숲 | 꽃잎 비명(碑銘) | 제비꽃, 봄 | 나무에게 | 세계에서 제일 예쁜 동네 | 극빈 | 나무의 본적 |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싶었다 | 나비는 침략자
지구가 한 살이었을 때 | 의자의 충고 | 갠 날 아침 | 불을 끄고 별을 켠다 | 마음은 천 리 | 멘델스존 듣는 아침 |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 아픈 사람을 위한 시 | 너 때문에 물그릇을 엎지른다 | 언제나 나는 최초라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쓴다 | 휘경이 | 국어사전 | 오늘은 헌 양복이나 수선해 와야겠다 | 한 해의 약속 | 너무 아름다운 것은 슬픔입니다 | 기다림은 왜 이렇게 잘 자랄까요 | 시인 | 눈으로 했던 약속처럼 | 짐짝 | 쌀 한 톨 | 오늘에게 드리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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